<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58>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것을 당장 말로 해결하지 말라고. 말이라는 것이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고 상대의 상황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그 의미가 너무도 달리 해석 될 수 있고 그 말을 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부풀려지거나 생략되어 말 한 사람의 의도와는 너무 달라져 문제를 도리어 크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어떤 경우라도 <침묵>보다 좋은 해결책은 없다고.
가끔씩 마주치게 되는 그런 상황에서 정말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게 나을 진정 입을 다물자는 마음으로 지나온 적이 있는데 되돌아보니 어처구니없고 울컥하는 마음에 말로서 설명하고 해결하고자 몸부림쳤던 것 보다 더 빠른 시간에 더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참 공감이 가는 말이 되었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노력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언어가 결코 우리의 진실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
하지만 요 며칠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그냥 있자,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제 머릿속에는 너무도 많은 글들이 쓰여 지고 있는 것을 깨닫곤 했습니다. 알다시피 저는 ‘중증 낙관주의자’인 사람인데 이번에는 그냥 있자는 스스로의 만류를 끝내 듣지 않고 이 글을 씁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글을 끝까지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벌써부터 눈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어서.... 그러면서도 쓸 수밖에 없는 저를 어찌해야 할지....
교사가 학부모에게 무릎을 꿇었다, 중학생이 교사를 발로 걷어찼다,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 교총이 명예훼손죄로 학부모를 고발했다....등등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저희 교사들의 잘못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저희 교사들의 잘못입니다.
너무나 열심히 하고 계시는, 존경이라는 단어가 무색한 이 땅의 많은 선생님들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는 저희들 탓이라 말합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면 자주 이야기 되어지는 것 중 하나가 ‘군사부 일체’라는 말입니다. 군주를 제외한 ‘사부 일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부모와 스승이 같다‘ 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같은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요? 이분법적으로 딱 잘라 어느 것이다 말할 수 없겠지만 저는 후자 쪽이 더 클 거라는 생각과 함께 이 말은 저희 교사들을 참으로 힘들게 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스스로에게 ’부모‘와 같은 마음일까를 물어보면서 자신 있게 그렇다 대답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나 학부모님들과 이야기를 할 때 그마나 이야기 하는 것이 ’부모만큼이야 하겠습니까 만은 학교 담임은 그래도 반 부모라고는 할 수 있으니...‘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반부모, 라는 것도 어쩌면 저의 변명이나 허영일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선생님들도 많다는 걸 잊지 말아주시고 이 글은 이 땅의 모든 교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글이 아닌, 저 개인의 생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시면서 이 글을 계속 읽어 주십시오.
조금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겠습니다. 저희 학교에는 5월 1일부터 교생 실습을 나온 대학 4년생들이 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과학과에도 4명의 교생들이 왔습니다. 제가 워낙 빡신(?) 사람이다 보니 아마 과학과 네 사람이 가장 힘든 실습 기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교감 선생님들께서 걱정을 하실 정도입니다. 다른 교생들과 비교하면서 불만이 많을 거라면서. 하지만 저는 꿋꿋이 빡빡한 일정을 강행군하고 있는 중입니다.
첫 과제는 ‘나는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가’였습니다. 그 과제에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써 온 교생이 있었습니다. 아마 많은 사범대생이, 그리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범대에 들어 온 후 단 한 번도 내가 어떤 선생님이 되고 싶은 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단지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선생님이 되는 것에 급급해 그 후에 내가 선생님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 지 어떤 선생님이 되고 싶은 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본적이 없다>
그 선생님은 저의 과제를 통해 스스로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 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좋은 교사가 되었으면 하는 나름대로의 큰 그림을 그려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과제는 끝없이 이어졌고 마지막 과제는 저희 반 35명의 학교 생활기록부 ‘행동 특성 및 종합 의견’에 적을 내용을 써보는 것입니다. 1년의 가장 마지막 일이면서 참으로 힘든 작업이기도 한 것을 교생 실습의 마지막 과제로 주었습니다. 비록 4주 동안의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동안 알게 된 아이들에 대해 기록을 남기게 되는 작업이지요. 한두 줄로 남겨지는 아이들에 대한 글이지만 분명 그 속에는 그 아이가 담겨져 있어야 하니까요.
교생들에게 일어났던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실제 상황 1>
지도교사인 제가 없는 상황에서 교생이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 사람의 동료들이 뒤에 있기는 하지만 지도 교사가 없을 때의 상황도 경험을 하게 해보자는 의도에서 였습니다. 그 수업 후 교생들은 별 말이 없었지만 수업을 한 학급의 아이들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아이들이 교생 선생님 수업 시간에 떠들고 난리가 났었다고. 왜 선생님이 안 들어오셨느냐고? 얼마나 떠들었으면 떠든 자신들이 미안해서 나를 찾아 왔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그 아이들이 너무 예뻐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교생선생님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증이 생기더군요. 오후 협의회 시간에 수업이 어땠느냐 물었더니 수업을 한 교생도 뒤에서 그 수업을 지켜 본 나머지 세 사람도 입안으로만 뭐라 그럴 뿐 분명히 말을 안 하더군요.
“아이들이 많이 떠들었다죠?
저의 이 한마디에 모두들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아이들이 얼마나 떠들었는지, 떠들기만 했다면 그래도 이해를 하겠지만 돌아다니고 심지어 어떤 아이는 뭘 먹기 까지 하더라고.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너무 화가 나더라고. 그런 교생에게 제가 아주 잔인한 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 선생님이 느껴야했던 감정은 화가 난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모두들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군요.
“50분 수업은 선생님의 책임입니다. 그 아이들이 수업에 참여를 하고 안하고는 그 아이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선생님의 문제에요. 아이들이 재미있었더라면, 귀를 기우리고 듣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그랬을까요? 아이들이 통제가 안 된다고 그래서 화가 났었다고 했는데 통제를 못해서 부끄러웠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은데요. 물론 아이들 탓이 없다고는 하지 못하죠. 아마도 교생 선생님이라고 쉽게 보고 그랬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오늘과 같은 상황은 현장에 나가서도 언제든 맞이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럴 때 그냥 화가 나더라, 도저히 통제가 안 되서 수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래도 되는 걸까요? 아이들을 탓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 아이들이 내 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거지? 왜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저희들끼리 저러는 거지? 내가 준비한 수업 내용이 아이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도록 구성이 되어 있는지? 아이들이 한 번 들어 보고 싶어, 하는 솔깃한 동기 유발을 해주고 있는 건지...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수업에 참여 하고 안 하고는 굳이 나누자면 저는 학생들 1%, 교사 99%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사도 인간이다 보니 무시당하는 거 같고 괘씸하고 속상하겠죠? 그렇지만 그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 다음으로의 파급 효과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거죠. 그러고 난 뒤 그 다음 시간에는 또 어쩔거죠?”
저 많이 못땠죠? 담당 교생은 급기야 눈물을 보이더군요. 하지만 이런 상황은 교생 실습이 아닌 실제 상황에서도 분명히 생기기 때문에 연습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실제 상황2>
오후 협의회 시간에 한 교생이 이러는 겁니다.
“아까 수업하다가..... 형성평가 풀 때.... 정말 너무 황당해서.....”
그렇게 말하는 교생의 얼굴은 참으로 복잡했습니다. 그날 수업에는 제가 뒤에서 참관을 했었는데 교탁 부근에서 일어난 일이라 저는 몰랐었습니다.
들어 본 상황은 이랬습니다. 수업의 마지막 부분에 형성평가를 풀게 한 뒤 개별로 검사를 맞게 했는데 한 아이가 틀린 문제가 있어 다시 풀어서 오라고 하면서 시험지를 돌려주려고 하자 아이가 시험지를 홱!! 하고 뺐으며 이렇게 말하고 가더라는 겁니다.
“됐어요. 검사 안 받아도 돼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말투와 표정이....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그 반 실장을 통해 그렇게 말 한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교무실로 온 아이는 두 팔을 허리에 얹은 채 제게 묻더군요.
“왜요?”
“교생 선생님이 형성평가 틀린 문제 있다고 다시 풀어오라고 했었다면서?”
“근데요?”
“됐다고, 검사 안받아도 된다고 했다는데?”
“네.”
“그렇게 말 할 때 너의 말투와 표정이 교생 선생님을 많이 당황하게 했었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저 원래 그런데요. 다른 사람들도 저 표정보고 시비거느냐며 막 그러고. 말투도 원래 그래요. 그래서 친구들도 뭐라 그러는 애들 많아요.”
“그래? 그런데 허리에 얹은 그 팔은 좀 내리면 좋겠는데? 마치 나를 한 방 칠 것 같은 기세라 무서워. 호호호.”
“아? 팔요?”
“흐음....원래 말투와 표정이 그렇다”
아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더 찡그리고는 이러는 겁니다.
“저 진짜 원래 그런데요.”
“그래? 진짜 원래 그렇다... 이런 말이지? 선생님이 웬만해서는 아이들 혼내거나 하는 일 없는데 오늘은 너는 심하게 한번 갈궈야겠다. 쉬는 시간 끝나가니까 일단 교실에 가서 수업을 하고 다음 쉬는 시간에 다시 오너라.”
다시 쉬는 시간이 되어 저를 찾아 온 아이는 1시간 전과는 달리 많이 겁을 먹은 얼굴이었습니다. 제가 좀처럼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화를 내지 않지만 작년 재작년의 몇몇 사건(?)들로 인해 전설로 이어지고 있는 ‘정말 무섭다’의 주인공이거든요. 푸하하하
“오늘 심하게 한 번 갈궈주겠다는 말 듣고 올라가니 어땠어?”
“.....쫌....아니.... 많이 무서웠어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을 기다릴 때의 마음... 아마 아이는 많이 불안했을 겁니다.
“선생님이 지금부터 너를 정말 정말 많이 때릴 거야. 여기 교무실에서 참 많은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보는 곳에서 너를 엄청 두들겨 팰 거거든, 그래도 되지?”
“..............”
“넌 아마도 이러겠지? 왜 이래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요? 그러면서 거칠게 반항 할지도 몰라. 눈으로는 째려보고 팔로 때리는 선생님을 밀쳐낼 지도 모르고.”
“........”
“그래도 나는 때릴 거거든. 그렇게 내가 때리고 싶은 만큼 다 때리고 난 뒤에 이렇게 말 할 거야.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난 학생이 기분 나쁘게 하면 개 패듯이 패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넌 그대로 받아 들여, 라고. 난 원래 이런 사람이라서 이렇게 행동하는데 뭐가 잘못됐는데? 뭐가 문젠데? 라고.”
“.......”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을 해보자. 한 시간 전 너는 이렇게 말했지. 너는 원래 표정이 그렇고 말투가 그렇다고. 그 말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이 되어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는 문제가 아니고 원래 그런 애를 보고 기분 상해하는 상대방의 문제라고. 그런데 그걸 왜 너보고 뭐라 그러느냐고. 조금 전 선생님이 말한 것을 지금 선생님이 행동으로 옮기면 너는 어떨 것 같니? 나는 원래 애를 때는 선생이니까 때리는데 뭐가 문제야? 내가 애를 잘 때리는 선생이라 때린 건데... 원래 그래서 그런 거니까 문제 될 게 없다고, 맞은 너야 아프기야 하겠지만 너 아픈 거까지 왜 내가 생각하고 배려해주어야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라고 한다면?”
“..... 기분 나쁠 것 같아요.”
“그래? 왜 기분이 나빠? 원래 그런 사람이 그러는데 이해해 줘야하지 않을까?”
“,,, 이해가 안 될 것 같아요. .... 분하고 억울하고... 왜 카는데 싶고....”
“똑같지 않을까? 선생님이 좀 극단적인 예를 들기는 했지만 네가 교생선생님에게 한 말과 행동, 잘 생각해봐. 그 선생님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면 저 아이는 원래 저런 아이니까 이해해줘야지, 하고 넘어 가야하는 걸까? 그 선생님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 나빴을 것 같아요.”
“선생님이 너 때리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지금 기분은 어때?”
“.... 많이... 많이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주먹으로 한 방 치는 것만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야. 말과 행동, 눈빛 하나로도 충분히 때리는 것 보다 더 아프게 할 수 있어. 그런데 너는 정말 이쁜 얼굴을 가지고 있구나. 우리 반 아이 아니다 보니 너를 이렇게 오래 볼 시간이 없어 그 동안 몰랐는데 넌 콧대도 오똑하고 특히 눈매가 아주 매력 있는데? 이런 이쁜 얼굴을 누가 봐도 시비를 걸만큼 잔뜩 구기고 있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니? 조금만 더 밝으면 네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100% 발휘할 텐데... 지금의 너는 그 아름다움의 5%도 못 나타내고 있다는 거 알고 있니?”
아이는 제 말에 피식 웃더군요.
“거봐. 그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이뻐. 정말 이쁘구나. 앞으로 네가 어떤 얼굴로 살아갈 지는 오로지 너의 몫이야. 그리고 교생 선생님과의 일에 대해 잘 생각해 보기 바래. 그리고 교생 선생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네가 선택해. 억지 사과는 안 해도 돼. 네가 생각해 보고 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하길 바라고 선생님은 네가 이쁜 얼굴만큼 현명하리라 믿는다. 잘가, 안녕!”
아이를 돌려 보낸 뒤 교생에게 아이와의 대화 내용을 전했습니다.
1년 후면 두 사람의 교생은 현장에 나갈 지도 모릅니다. 실습 기간이 아니라 현장에서 처음으로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면...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 역시 초임에는 이런 경험 미숙으로 인한 시행착오를 엄청했었고요. 제가 교생들에게 정말 무지 많은 과제를 주는 것은 현장에 먼저 가보고, 너무 많이 당황해보고 고민해 봤던 선배이기에 저 보다는 조금 덜 당황하고 조금 덜 고민하고 적은 시행착오를 하기를 바라는,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교사의 시행착오는 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학생들과 직결되는 것이니까요.
스물 셋의 교생들이 두 상황에서 느낀 감정은 그저 우리 모두가 공통으로 느끼는 ‘인간적인’ 것들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걸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렇게 느끼면 안 된다고 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지요. 분명 그렇게 느끼겠지만 그건 잠시, 정말 순간의 감정으로 한 뒤 그 다음으로 변형 확장된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화가 난다는 감정 바로 다음에 뭐가 문제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수업에 참여를 시킬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 방법을 찾는 것으로. 아이의 무례한 태도에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감정은 잠시, 이 아이가 왜 이렇게 행동을 할까? 아이가 이렇게 행동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뭘까? 내가 먼저 아이의 감정을 상하게 하진 않았을까? 아이가 상대방과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지 그 방법을 몰라 이렇게 행동하는 거라면 이 아이를 어떻게 도와줄까를.
교권은 무엇일까요? 교사의 권리....
교사가 누려야 할 권리일까요? 저는 교사의 권리는 ‘교육 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육을 하기 위해 지켜지고 존중되어야 할 것이 포함이 되겠지요. 저는 3월에 아이들을 처음 만나면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합니다.
“고마워요. 여러분들은 선생님이 교사라는 직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정말 고마운 존재랍니다. 선생님은 교사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 혼자 하고 싶다고 되는 걸까요? 아무리 선생님이 학교에 오고 싶고 교사라는 직업이 좋다고 해도 학생이 없으면요? 막말로 이 세상에 아무도 학교에 오는 사람이 없으면요? 학생이 단 한 사람도 없으면 내가 어떻게 교사로 살아가죠? 그래서 여러분들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너무도 고맙고 그래서 선생님에게는 너무 소중해요.”
이러는 제가 학생들에게 비굴해 보이시나요?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교권은 누가 저희들에게 주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학생에게 맞았다고 해서, 학부모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교권이 무너졌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교권은 저희 교사들이
“그래, 저 자슥은 도저히 안 되겠어. 저런 놈이 뭔 인간이 되겠어.”
하며 스스로 교육할 의지를 포기할 때, 그 때 저희들 안에서 처참히 무너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학부모를 고발한다고 해서 명예가 되살아날까요? 저희들에게 제일 소중하면서도 무서운 것은 바로 아이들이 아닐까요? 그것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저희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고발과 함께 이어질 일련의 과정에서 어쩌면 저희의 존재의 이유인 아이를 아프게 해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입니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또는 변명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어떤 것을 떠넘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데도요? 그렇게 해서 법원이 명예를 회복시켜주면요? 법원의 판결로 명예가 회복될까요?
저희들의 명예는 저희와 아이들이 함께 키워갈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묵묵히 저희 자리에서 지금 저희와 함께 하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폭력을 당한 교사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잘못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그 아이는 바로 저희들의 제자가 아닙니까? 교권, 교육의 권리를 가진 자가 누구인가요? 바로 교사인 저희들입니다. 그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한 건 결국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결과라면? 그 책임은요? 바로 저희들입니다.
다른 거 다 묻어두고 단 한 가지만 생각했으면 합니다. 바로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그런 아이라서....
저는 이런 말만은 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설령 그 아이가 정말 그렇다하더라도 그렇게 까지 해야 했을까요? 아직 아이인데... 그리고 그 아이가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갔다면 그 어떤 아이보다 더 보듬어져야 할, 상처가 많은 아이일 텐데...
그저 아무리 억울하고 속상하고, 그래서 어디 벽에 머리를 콱 쳐 박았으면 좋겠다 싶어도 저희는 그 아이들의 선생님이잖아요. 그 어떤 것보다 그 아이가 보호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저는 어처구니없는 이상주의일까요? 부모가 잘못 키워서 그렇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다는 못되어도 반부모라 말하곤 하는 저희들이잖아요.
그러기에 그 어떤 경우라도,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그저 저희들이 다, 모두 다 잘못했다,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위의 두 상황을 맞았던 교생도 어쩌면 1년 뒤에 현장에서 더 이상 교생이 아닌 교사로서 살아가게 될 겁니다. 아이들과의 관계 형성을 잘 하지 못해 참으로 많은 어려운 상황을 맞을 수도 있겠지요.
그건 교사 개인의 인격이나 소양의 문제라기보다는 교육에 의해 키워져야 할 부분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은 언론과 사범대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와 아이 모두 피해자라고.
언론에서는 왜 그런 보도를 했을까요? 어떤 것이든 방송을 통해 보도가 될 때는 그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될 수 있으면 긍정적이어야 하고요. 하다못해 유치한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저는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지만 그 중 가장 안 보는 것이 뉴스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물정 몰라 이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어느 공장에 불이 나 몇 천 만원의 피해가 난 것을 전 국민이 알아야 하는 걸까요? 경부고속도로에서 운전미숙으로 교통사고가 나서 몇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는 것을 적어도 하루에 세 번 이상의, 모든 방송국 뉴스마다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대중들의 생활에 어떤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까요? 불조심을 해야 한다, 안하면 이렇게 재산상의 불이익을 당한다는 교훈? 운전 잘 못해 사고나 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유용한 정보?
오늘 뉴스를 통해 들은 것 중 기분 좋은, 또는 정말 삶에 보탬이 되는 것이 몇 가지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면 재미있거나 보고 있으니 즐겁던 것.
얼마 전 한 방송국 PD가 학교로 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저의 일상을 찍고 싶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묻더군요.
“요즘 애들 말 잘 안 듣죠?”
정말 울컥!!! 하더군요.
“잘 들어요.”
“그래요? 많이 거칠다고 하던데?”
“누가요?”
“요즘 매스컴에 보면.... 난리잖아요. 학생들....학교 폭력이다 뭐다....”
“아니요. 저희 학교 아이들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말도 잘 듣고 거친 애도 없고.”
이번에는 그 피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더군요.
“그래요? 그래도 다들....”
“학교에 와 보지도 않고 학교가 어떻다 학생이 어떻다 말도 많죠. 물론 그런 아이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더 많아요.”
왜 저 사람에게는 저런 부정적인 학생상이 담겨져 있을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언론이라는 생각이 들어 피디의 뒷모습이 더더욱 씁쓸하더군요. 촬영은 하지 않게 되어 다시 볼 기회는 없어진 그 피디를 떠올리니 지금도 못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 사람과 같은 생각으로 학교와 아이들, 그리고 교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거라는 생각에.
물론 말썽을 부리는 아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중학생이 몇 명입니다. 수십만 명의 학생 중 선생님을 때린 그 아이보다는 선생님과 너무도 잘 지내는 아이들이 더 많습니다. 이쁜 아이들은 당연하니 관심이 없습니다. 저희 반 아이들 모두 너무 이쁘고 착한데 그 아이들 아마 학교 졸업할 때까지 언론에서 1%의 관신도 안 가질 겁니다. 그러다 혹시 말썽을 피우는 아이가 생긴다면 방송, 신문, 인터넷 모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겁니다. 아이들 농담으로 이런 말 까지 합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제일 빠른 방법이 뭔지 아니? 선생 한 방 먹이는 거야. 그럼 바로 일약 스타(?)가 될 걸."
그 아이가 물론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지만 그것을 보도한 이유가 그 효과는 무엇일까요?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 거 외에 무엇이 남았는지요? 그리고 그것을 보는 국민들에게 어떤 것을 주었는지요? 놀라움, 황당함, 분노......? 무너진 교권에 대한 한탄? 학부모들의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만 고조? 그것이 언론의 역할인가요?
그리고 사범대학에 정말로 할 말이 많습니다. 교직을 이제 더 이상 전문직이라 말 할 수 없게 된 것은 사범대학의 탓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범대학에 이렇게 요구를 하고 싶습니다. 4년 중 최소한, 정말 최소한 2년 이상은 상담에 관해 가르치라고. 책으로 배우는 이론도 중요하지만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실무적인 것으로. 그리고 임용고시는 다른 건 몰라도 상담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응시할 자격을 주었으면 하는 것 또한 저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학교 현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교과에 대한 전문 지식 보다는 학생들과의 관계 형성입니다. 그것에 대한 준비 없이 현장에 오게 되면 정말 너무나 많은 어려운 상황과 부딪치게 됩니다. 개인적인 인격의 문제도 적지 않지만 훈련과 방법의 문제인 거죠. 그것을 사범대학이 가장 철저하게 준비를 시켜주어야 하는데 현실은 0%도 안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사범대학 4년 동안 그 누구도 이야기 해주지 않고 가르쳐 주지 않아 아무 준비 없이 현장에 가서 많은 시행착오를 했었던 제가 가장 절실했던 것이기에...
누군가 이러더군요.
“교사가 지식 전달자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지. 학교 선생이 학원 선생하고 같나? 교과서 들고 그 안에 내용이야 누구나 가르칠 수 있는 거 아닌가. 심지어 대학생 과외선생이 더 잘 가르치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야. 그것보다 큰 거, 그걸 학교 선생이 해줘야 하는 거거든.”
그런데 그건 누가 가르쳐주죠? 그저 학교 선생 개인의 몫일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바로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사범대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저희 교생들이 경험했던 그런 것에 대한 준비도 사실 대학에서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과 학생들이 학생 역할을 해주면서 학교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을 간접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범대학에서 배우는 내용입니다. 외국 원서들을 가지고 어려운 공부 많이 들 합니다.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는데 정말 필요한 지식일까요? 저도 그랬지만 교생들은 실습 나오기 전까지 대학에서 교과서를 공부하기는커녕 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배우고 있는 사범대학생들이 교과서를 모르고 가능할까요? 대학에서의 공부는 따로, 발령받아 현장에 가서 교과서 처음 받아 교재 연구해서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정말 끙끙거리게 된답니다.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기 위해서는 중고등학교 전공 교과의 교과서는 기본이고 초등학교 전 학년의 관련 교과서는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서 어느 부분을 어디 까지 배웠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범대학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은 바로 교과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의 내용들을 파악하고 난 뒤 그와 관련 된 전문 지식들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전문적인 내용의 범위와 깊이를 결정한 뒤 체계화 하고 난 뒤에는 그것을 전달할 방법에 대해 연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처럼 과학이 전공이라면 이 단원은 실험 수업이 효과적일지 이론 수업이 효과적일지를, 시청각 자료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여러 사람들이 같이 제작을 해보기도 하고 각자 아이디어를 내어 새로운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인 수업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최대한의 준비와 연습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중고등학교에서 한 두 마디 해 볼까 말까 하는 내용을 배우느라 그 시간들을 다 보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전문인을 양성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사범대학, 그렇다보니 전문인으로서의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임용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학원을 찾고 있는 사범대학 졸업생들.
학원을 찾는 아이들을 보고 공교육이 무너졌다는 말을 하지만 바로 이처럼 교사 자격증을 따는 것에서부터 이미 공교육은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대학 다니는 것으로는 임용고시에 합격할 수 없어 학원을 찾는 현실은 학교 공부만으로 대학에 합격하지 못해 학원을 찾는 아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그렇게 학원의 도움을 받아 교사 자격증을 얻은 교사들이 현장에 가면 아이들에게 학교만으로는 부족하니 학원에 다녀 보는 것이 어떻겠니, 라고 학생에게 권하지는 않을까요? 제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가는 곳인 사범대학에서 그것을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당연한 것이 제대로 안되고 있는 현실과 언론의 무책임하고 자극적인 보도로 인해 학생과 교사 모두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도 꼭 드리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학부모님들로 인해 교육은 여전히 희망적이라는 것. 많은 어머니들이 교육 현실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에게 물어보면 자식이, 그 중에서도 딸이 교대나 사범대학에 가서 교사가 되었으면 하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 소중한 자식들이 교사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지금의 교육 현실이 많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서 똑똑하고 제대로 가르친 당신들의 딸들로 이 땅의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해보이고 싶다는 열망이 아닐까 생각하니 저희 교육은 절대로 절망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저 또한 열심히 하겠지만 후배들에게 기대를 걸어 봅니다. 그렇지만 작은 불안도 있습니다. 교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진정 아이들의 꿈인 지 아니면 단지 어머니들의 희망인 지......
너무도 긴 글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의 감정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쓴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 밤 열두시가 넘어 집에 돌아 온 남편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를 못내 불안해 하면서 지켜 보고 있습니다.
"홈페이지에 올릴 글이라고? 그냥 가만히 있지. 또 무슨 욕을 얻어 먹으려고... 이런 건 특히 조심해야 하는 건데...."
한 마디 똑 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속으로 이랬습니다.
'그러게....
그래도 써야 하는 내 마음을 당신이 어찌 알겠소.....'
오늘도 너무도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함께 읽어 보았으면 하는 책 두 권, <엑소더스>와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를 소개합니다.
일본의 모든 중학생이 등교거부를 하고 인터넷을 통한 사업을 해 돈을 벌어 그들만의 새로운 도시를 만든다는 내용을 주축으로 하는 <엑소더스>
이 소설의 내용처럼 모든 아이들이 학교를 거부한다면 제일 먼저 사라지게 될 직업이 바로 교사라는 것에 저는 가슴이 철렁하고 섬뜩했습니다. 읽는 내내 가슴 조리며 읽은 것은 아마도 제가 교사라는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요.
책 속의 중학생의 말입니다.
<나이프로 선생을 찌른 후쿠오카시, 히가시덴젠 중학교의 요시나가 노리오 군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프로 찔러도 결국 손해보는 쪽은 우리입니다. 요컨대 체포되면 그것으로 끝장이라는 겁니다. 결국은 단순한 범죄로 처리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대는 본질적으로 멍청이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학교를 쉬어서는 별 재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학교를 바꾸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을 찌른다고 학교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단, 선생을 찌르는 행위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화가 난다고 그냥 찔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강건한 의지를 가지고 면밀한 계획아래, 그 행동이 우리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선생을 찌르는 행위는 정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선생을 찌른다는 것은 폭력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포 영화보다 더 가슴이 서늘해지지 않습니까? 책 속에서 아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은 우리를 직접 가르치는 입장에 있지만, 선생이 도대체 뭘 위해 살아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어떤 인간이 되면 좋은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다만, 공부해라, 좋은 고등학교에, 좋은 대학에, 좋은 회사에, 좋은 직업을,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로 올라가다보면 좋은 학교에 가도, 좋은 회사에 가도, 세상에 어떤 바보라도 별로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빠른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교와 교사들은 그들의 바람(?)같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늘 뒤에서 헉헉 거리고 있는 중인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얘들아, 정말 숨가쁘게 뛰지만 선생님은 늘 너희들의 뒤에 있구나. 너희들이 보기에 우리들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하겠다 싶고 우리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몰라. 그래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하지만 말이야. 변명 같지만 우리도 그렇게 살아 왔단다. 너희들처럼 그렇게 우리의 앞 세대들을 향해서 그렇게 외치면서 살아왔지만 그래도 늘 불행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해. 희망은 누가 내게 만들어 선물해 주는 것이 아니었어. 우리가, 내가 만들어 가는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너희 눈에는 정말 답답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도 정말 열심히 애쓴다는 걸, 그래서 너희들과 함께, 우리 따로 너희 따로가 아닌 너희와 같이 희망을 만들어 가고 싶어 애쓴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아주렴.”
아이들을 찾아 일본의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미즈타니 선생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
4년 동안 본드를 ‘유일한 친구’로 여기며 살아 온 아이 마사후미. 그 아이가 본드를 끊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미즈타니 선생님을 찾아 학교로 온 마사후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역시나 전 산생님의 도움만으로는 본드를 끊지 못하겠어요. 이 신문에 있는 병원에 좀 데려다 주세요”
책의 내용을 옮겨 봅니다.
나는 화가 났다. 이렇게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데, 본드의 늪에서 꺼내주려고 애쓰고 있는데, ”당신은 안돼“라는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마사후미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굳게 믿어버린 나는 결국 이날 마사후미를 차갑게 대하고 말았다.
‘이렇게 열심히 보살펴 주었는데, 이 녀석이....“
“오늘밤 선생님 집에 가도 되죠?”
마사후미가 물었으나 그 순간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던 것 같다. 나는 쌀쌀한 거절의 말과 함께 그를 돌려보냈다.
“오늘 밤 경찰과 함께 공개 순찰을 나가야 돼서 안돼.”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마사후미는 내 쪽을 몇 번이나 돌아보면서 “선생님, 오늘은 냉정하시네요”라고 중얼거렸다. 결국 이 말이 마사후미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 되었다.
그날 새벽에 마사후미는 본드를 한 상태에서 달리는 트럭으로 뛰어 들었고 아이는 즉사해버렸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선생님은 교사가 될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짐을 정리하던 중 마사후미가 오려와 건네주었던 신문기사를 보고는 교사를 그만두기 전에 병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아보기로 합니다.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면서. 현립 정신의료센터 ‘세라가야 병원’의 원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즈타니 선생, 그를 죽인 건 당신이에요. 본드와 각성제는 그렇게 간단히 끊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의존증이라는 병입니다. 병은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그 병을 ‘사랑’의 힘으로 고치려고 했소. 하지만 병을 ‘사랑’이나 ‘벌’의 힘으로 고칠 수 있습니까? 고열로 괴로워하고 있는 학생에게, 애정을 담아 힘껏 껴안아 준다고 열이 내려갑니까? ‘너의 근성이 해이해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야단을 친다고 열이 내려갑니까? 병을 고치는 건 우리 의사들의 일이랍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대답할 말도 찾지 못한 채 죄책감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미즈타니 선생, 당신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교사를 그만두려고 했겠죠. 제발 그만두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군요. 앞으로 마사후미처럼 약물이라는 늪에 빠져드는 젊은이는 계속 늘어갈 거예요. 하지만 교육 관계자들 중에 이런 문제에 매달리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우리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지 않겠습니까?”
이게 내가 약물과 싸움을 시작하게 된 계기이다.
사진과 함께 그리 길지 않은 글로 구성된 이 책은 눈으로 보다 가슴으로 읽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정말 많이 절망이라는 단어를 안겨 주지만 또 그 보다 더 많이 희망이라는 단어를 저희들에게 줍니다. 저는 미즈타니 선생님이 마사후미에게 화가 났던 것을 정말 너무나 공감을 합니다. 정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던 아이는 그 다음 날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한 번만 믿어 달라고 ‘다시는’ 이라는 말을 되풀이 하고. 그러다가 자신도 지치면
‘됐어요. 저란 놈 이렇게 살다 말겠죠. 쌤이 절 어떻게 도와준다고 그래요. 보셨잖아요. 저 안 되는 거. 그러니 선생님도 이제 다시 오지 마요.’
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던 아이. 그럴 때 저도 똑같이 화가 나고 괘씸하고 절망하곤 그랬거든요.
‘그래, 이 자식아. 평생 이러고 살아라. 나도 너 데리고 이러는 거 이젠 질렸어. 그러니 너 이제 혼자서 알아서 해. 계속 이러고 살던 지 말던 지 선생님도 이제는 몰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던 적이 정말 몇 번이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 아이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도 그리고 그 아이들과 함께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도 바로 저희들의 몫이라는 거, 바로 이것이 교육할 권리, 제가 꼭 지켜나가야 하는 교권이라는 것이라 믿기에.
책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괜찮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저, 도둑질한 적 있어요.”
괜찮아.
“저, 원조교제했어요.”
괜찮아.
“저, 친구 왕따시키고 괴롭힌 적 있어요.”
괜찮아.
“저, 본드했어요.”
괜찮아.
“저, 폭주족이었어요.”
괜찮아.
“저, 죽으려고 손목을 그은 적 있어요.”
괜찮아.
“저, 공갈한 적 있어요.”
괜찮아.
“나, 학교도 안가고 집에만 쳐박혀 있었어요.”
괜찮아.
어제까지의 일들은 전부 괜찮단다.
“저, 죽어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얘들아,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우선 오늘부터 나랑 같이 생각해보자.
내게는 아이들의 과거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현재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시간이 걸려도 좋고, 누군가의 도움을 빌려도 좋으니까, 그들이 자신의 뜻과 자신의 힘으로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갔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그러려면 무조건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살아주기만 해도 좋다. 살다보면 아이들은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서 서서히 인생을 배워간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어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떤 아이라도 그들이 살아 온 과거와 현재를 인정하고, 제대로 칭찬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지금까지 정말 잘 살아줬어.”
얘야, 살아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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