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손수레를 타고 지옥으로 달려간다고 치자. <톱기어> 에디터가 손수레 대신 핫해치를 몰고 간다면 어떻겠냐며 슬쩍 운을 뗀다. 게다가 굳이 핫해치를 고르라고 한다면 딱 한 대밖에 없다고 하는데…
경제성을 들먹이지 않고 신형 골프 GTI 시승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한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은 어떤 차를 추천해야 할 시기, 아니 그 이상으로 대담한 주장을 할 때다. 6세대 골프 GTI가 지금 당장 살 수 있는 세계 최고의 차라고 말이다. ‘세계 최고’라는 말은 어느 모로 보나 완전히 주관적 표현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지금의 자동차 시장과 경제사정, 근심에 잠긴 영국 총리를 보면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당분간 우리 모두가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골프 GTI가 시장을 파고드는 것은 당연하다.
불과 얼마 전이었다. 런던 남서부의 빅토리아식 저택에 사는 30대 중반의 펀드 매니저가 최신형 포르쉐 카레라 S를 사들였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1.4리터짜리 폭스바겐 폴로를 선물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세계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다. 주인공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도 사정은 확 달라졌다.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집안 걱정을 하게 된다. 혹은, 사립학교를 포기한 자녀들을 어느 공립학교에 보내느냐를 고민한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녀들이 어린시절을 무사히 보내기를 마음 속으로 빈다. 혹은 그와 비슷한 시름에 잠긴다.
불경기를 견디기 위해 두 대였던 승용차도 한 대로 줄인다. 그러려면 갈 길은 하나밖에 없다. 포르쉐를 포기한다. 포르쉐 오너가 받아들일 수 있을 핫해치는? 오직 골프 GTI뿐이다.
이 차는 그 모든 것을 해낸다. 다른 어느 차보다 잘해낸다. 하다 못해 그 일부라도 훌륭히 수행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 모든 것'이란 성능, 실용성, 용이성, 경제성, 신뢰성, 내구성, 안전성, 품질과 정밀성을 가리킨다. 나아가 다른 어떤 차보다 잘할 수 있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6세대 골프 GTI는 때맞춰 등장했다. 포르쉐와 저 폴로는 일종의 줄기세포 연구의 대상. 그리고, 아무도 빠른 차를 살 여유가 없을 때 갈 길을 열어준다. 무절제와 보수주의의 복합적인 혼혈아. 그래서 본질적으로 완벽하다.
이 모든 일은 5년 전에 시작됐다. 5세대 골프 GTI가 시장에 나왔고, 온 세상이 일어나 주목했다. 명색뿐인 터보를 터덜거리며 다니던 쇼핑 카트의 골치 아픈 옛 시절은 지나갔다. 새로 등장한 모델은 빈틈없는 현대적 머신. 첫 골프 GTI가 나와 고성능을 자랑하던 핫해치의 평화시대를 돌이켜본다. 그 선배와 마찬가지로 5세대는 나긋나긋하고 날렵하며 무척 빠르면서도 비교적 부담이 크지 않았다. 마땅히 그래야겠지만, 바로 이때 핫해치는 여피들의 손으로 넘어갔다(혹은 21세기에 등장할 후예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올해는 GTI 탄생 33주년. 이번에 새로 나온 GTI는 5세대의 아주 절묘한 진화형이다. 조금도 나이든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손질을 한 곳은 더 좋아졌을 뿐이고, 위대한 선배의 장점을 조금도 깎아 내리지 않았다.
이제 엔진은 덩치를 훨씬 줄였고, 무게도 3킬로그램이나 가볍다. 그와 더불어 한층 친환경적이고 연료효율이 높다. 출력은 10마력 올라갔고, 최대토크의 회전대는 100rpm 내려갔다. 모두가 사소한 듯하지만, 합쳐놓으면 전체적인 실력이 한층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결과 최고출력은 207마력. 0→시속 100km 가속에 필요한 시간은 7.2초, 최고시속은 238km다. 구형과 거의 같은 숫자다.
그 중에서도 가장 뜻 깊은 변화는 미학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5세대는 극히 의도적으로 1세대에 경의를 표했다. 당장 눈에 익은 다양한 스타일 요소를 빌려와 좀더 다듬었다. 6세대는 여기서 좀더 나아갔다. 향수를 살리면서도 보다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헤드램프 렌즈는 좀더 기하학적이다. 한편 그릴은 한결 단순하고 좁은 평행 슬릿을 넣었다. 그리고 이미 트레이트 마크가 된 빨간색으로 장식했다. 앞쪽 안개등은 범퍼 양쪽 끝으로 한껏 밀어냈다. 따라서 차 폭이 훨씬 넓어 보인다. 동시에 훨씬 공격적이고 위협적이다.
구형의 사이드 스커트는 리어 아치까지 올라가 약간 어색했다. 이번에는 훨씬 가느다란 검은 트림으로 바꿨다. 이로써 엉덩이가 한결 좁아진 듯한 인상을 준다. 코카콜라병의 곡선과 비슷하다. 폭스바겐 기술진은 이런 디자인이 공력효과에도 앞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멀리에서 보기에 얼마나 더 민첩하고 당당해보이는가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신형 GTI의 꼬리도 작으나마 대칭적 디자인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주문형 뒷범퍼는 번호판을 담은 장방형 공간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한편 기술진은 쌍둥이 배기 머플러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고, 양쪽 끝으로 한껏 벌렸다. 앞쪽 안개등과 비슷한 레이아웃이다.
전체적인 효과는 수수하면서도 뚜렷하다. 때문에 신형 GTI는 당장 알아볼 수 있다. 유럽에서 우리가 시승하던 날 금세 반응이 왔다.
폭스바겐은 GTI의 핵심 원리를 약간 비틀어올린 흔적이 보인다. 여전히 비싸고 철저한 독일차. 하지만 일부 디테일은 과도하게 손질한 느낌을 준다. 특히 헤드램프 렌즈와 라디에이터 그릴, 몬자 합금 휠에 새로 놓은 가늘고 검은 트림이 그렇다. 이런 차를 살 돈과 경비가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헛손질을 원치 않는다. 골프 GTI는 원래 고전적이고 차분하다.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어서 점차 스타일에 집착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5세대의 한결 조용한 스타일이 좋다. GTI는 당연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6세대 GTI의 조금 과장하는 경향은 실내로도 번졌다. 새 스티어링 휠은 거의 완벽했던 구형보다 살이 쪘다. 지금은 지나치게 커졌고 요란하며, 성가시다. 기어 노브는 새빨갛다―아니, 오렌지였던가? 어디서든 드러나는 실밥과 색상을 맞췄다. 아울러 없어도 괜찮을 좀더 현대적인 도어 트림이 있다. 체크무늬 직물시트는 5세대에서 향수를 일으키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신차에는 이마저 사라졌다. 그래도 아주 멋지고, 지난날의 폭스바겐을 일깨우는 흔적이 뚜렷하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모조 소재가 들어왔다.
신형은 몇 가지 값진 변화를 받아들였다. 안락성과 안전성이 한결 앞섰다. 방음처리가 훨씬 좋아지고, 무릎 에어백을 추가했다. 대시보드에는 경제성을 최대한 살리는 변속표시기가 달려있다.
GTI는 점진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거듭했다. 마찬가지로 운전성능도 점진적이면서 긍정적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꼭 알맞다.
5세대의 장점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GTI는 여전히 아주 편안하고 세련된 고급 해치백. 운전자에게 분에 넘치는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스티어링은 가벼우나 적극적이고 의사전달이 뚜렷하다. 럭셔리 아우디의 다양한 자매차들보다 더 침착하게 일을 해내는 듯하다. 이처럼 성능이 뛰어난 차로는 변속이 잽싸지 않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여전히 가볍고 쉬우며 직접적이다. 운전 모드를 콤포트(Comfort)에서 스포트(Sport)로 바꾼다. 그러면 댐퍼는 한결 단단해지고, 스티어링은 알맞게 무게를 더한다. 그러면 노면을 움켜쥐고 힘차게 달린다.
저회전대 토크와 하늘을 찌르는 출력. 이 같은 막강 파워로 GTI는 어떤 기어에서도 빠른 느낌을 준다. 텅 빈 직선코스에서 가속 페달을 콱 밟아보라. 실제로 그 이상의 가속력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고속으로 급커브를 공략한다. 그러면 가벼운 피칭을 계속 일으키면서도 안정되게 평형을 유지한다. 새로 나온 GTI의 제한슬립 디퍼렌셜(LSD)이 트랙션을 극대화한다. 급 브레이크를 밟으면 침착하면서도 번개같이 호응한다. 그리고 다시 가속 페달을 밟으면 주춤거리지 않고 속도를 높인다. 한편 트렁크는 엄청 크고, 제대로 된 뒷좌석을 갖췄다. 현대적인 모터링 체크 리스트에서 불합격 항목은 나오지 않았다. 그 중 하나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후진 기어에 들어가면 내비게이션 스크린에 주차 카메라가 잡은 영상이 뜬다. 카메라 렌즈는 007 본드카처럼 폭스바겐 트렁크 배지 뒤에 숨어있다.
따라서 이 차는 정말로 포르쉐와 폴로를 합성한 우리 시대의 고성능차라 할 만하다. 영국이나 유럽의 어느 도로에서도 빠르고 유능하다. 아주 수월하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상대적으로 값도 유리하다.
3도어 버전은 2만2천 파운드에서 시작한다. 곧 나올 포드 포커스 RS보다 약 3천 파운드 싸다. GTI는 변함없이 동급의 벤치마크다. 나는 아직 포커스 RS를 몰아보지 않았다. GTI보다 성능이 뚜렷이 앞서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군더더기 치장을 한 골프와 비교하더라도 RS는 허세가 심한 라이벌일 것이다. GTI가 오늘날의 911이라면 RS는 영국 수제 스포츠카인 TVR 투스칸과 같다. 따라서 어느 차를 고를지 점치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 <톱기어> 영국판 에디터인 맷 매스터가 쓴 글입니다. 사진은 VW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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